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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뷔히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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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오르크 뷔히너는 독일의 극작가, 소설가, 혁명가이자 과학자였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문학, 철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깊이 있는 탐구를 했으며, 24세의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뷔히너는 《단톤의 죽음》, 《렌츠》, 《레온스와 레나》, 《보이체크》 등 사회 비판적이고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남겼으며, 특히 미완성 희곡 《보이체크》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뷔히너의 작품은 사후에 재평가받아 독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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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뷔히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35년경 뷔히너의 연필 드로잉
1835년경 뷔히너의 연필 드로잉
본명카를 게오르크 뷔히너
출생1813년 10월 17일
출생지리트슈타트, 헤센 대공국
사망1837년 2월 19일
사망지취리히, 스위스
직업극작가
학력
모교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기센 대학교
작품 활동
대표작당통의 죽음
레온체와 레나
보이체크
가족
친척루트비히 뷔히너
루이제 뷔히너
에른스트 뷔히너

2. 생애

뷔히너는 다른 천재들과는 달리, 개인적인 성향보다는 더불어 사는 삶에서 참된 의미를 찾았다. 유복한 시민 계급 출신으로 미래가 보장되었음에도, 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반체제 운동과 굶주리는 농민을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기센에서 '인권협회'를 조직하고, 헤센 급전을 작성하여 농민의 혁명 의욕을 고취시키려 했다.[1]

뷔히너의 천재성은 문학뿐만 아니라 학문에서도 드러난다. 짧은 기간 동안 문학, 철학, 종교 등 고대 정신문화와 인문학 서적, 성경을 탐독했다. 셰익스피어, 호머, 괴테,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를 좋아했으며, 장 파울낭만주의 작가들의 작품도 읽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남기기도 했다.[1]

뷔히너 (1833/34년 친구 알렉시스 머스톤의 그림)


아버지의 강요로 의학을 전공했지만, 1836년 9월 물고기 신경조직에 관한 논문으로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취리히 대학교의 초빙을 받아 23세에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837년 1월 말 장티푸스에 걸려 2월 19일, 24세로 세상을 떠났다.[1] 약혼녀 빌헬미네 예글레는 뷔히너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그이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그이의 두 눈을 입맞춤으로 감겨드렸어요."라고 회고했다. 뷔히너는 취리히의 크라우트가르텐 공동묘지에 묻혔으며, 장례식에는 지역 유지들과 대학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취리히-오버슈트라스의 ''게르마니아휘겔''에 있는 게오르크 뷔히너의 묘비


뷔히너는 독일 헤센 대공국 리트슈타트(고델라우)에서 태어나 다름슈타트 김나지움을 다녔다. 1828년 정치에 관심을 갖고 윌리엄 셰익스피어 숭배 모임에 참여했는데, 이는 나중에 기센과 다름슈타트의 인권 협회(Gesellschaft für Menschenrechtede) 지부로 발전했다.[1]

1831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프랑스 문학과 정치 사상에 몰두했고, 프랑수아노엘 바뵈프와 클로드 앙리 드 생시몽의 공상적 사회주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1833년 기센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1]

기센에서 비밀 결사를 설립하고, 1834년 7월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바이디히의 도움으로 Der Hessische Landbote라는 혁명적 팜플렛을 출판했다. 그러나 당국에 의해 반역죄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바이디히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사망했다. 뷔히너는 스트라스부르로 도피하여 문학 작품을 쓰고 빅토르 위고의 희곡을 번역했다. 1836년 10월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취리히 대학교에서 해부학 강사로 임명되었으나, 장티푸스로 사망했다.[1]

2. 1. 가문과 가족

뷔히너는 1813년 헤센 대공국의 고델라우(현재는 리트슈타트의 일부)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3] 아버지 에른스트 카를 뷔히너는 나폴레옹 군의관으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의사였다.[4] 뷔히너의 가문은 증조부 대부터 외과의술을 가업으로 삼았다.[3] 어머니 카롤리네는 애국주의적 성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이었으며, 어린 뷔히너에게 성경과 민담을 들려주고 읽고 쓰기를 가르쳤다.[5]

뷔히너는 6남매 중 장남이었으며,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6]

이름설명
차남 빌헬름 뷔히너화학 공장 소유주, 헤센 주 의회 의원
셋째 아들 루트비히 뷔히너의사이자 철학자, 저서 『힘과 질량』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음.
차녀 루이제 뷔히너작가, 초기 여성 해방 운동가, 형 게오르크를 모델로 한 소설 『어떤 시인』 저술.
막내 알렉산더 뷔히너1848년 혁명 운동으로 프랑스 이주, 문학사 교수.


2. 2. 김나지움 시절

뷔히너는 1825년 다름슈타트의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뷔히너는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종교학, 역사학, 고고학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수학은 약한 분야였다.[2]

김나지움에서 뷔히너는 친한 친구들(그 중에는 후에 지하 운동에 관여하게 되는 미니게로데가 있었다)과 정치 담론을 나누었으며, 셰익스피어 낭독회를 열기도 했다.[2] 그는 이 시기에 문학 작품을 섭렵했으며, 셰익스피어, 괴테, 호메로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장 파울, 헤르더, 낭만주의 작가, 그리고 당시의 프랑스 문학도 높이 평가했다. 특히 뷔히너가 감명받은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였으며, 쉴러에 대해서는 존경하면서도 그의 수사적인 문체를 비판했다.[2]

뷔히너의 김나지움 시대 작문으로는 "자살에 관한 한 논문에 대한 비판", 카토 (우티카의)의 자살을 변호하는 "우티카의 카토론", 30년 전쟁에서의 전사자를 주제로 한 "400명의 포르츠하임인의 장렬한 전사" 등 세 편이 묶여서 남아 있다. 명예로운 죽음을 칭송하는 이들 글에서는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의 강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2]

2. 3. 스트라스부르 대학 시절

1831년, 뷔히너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독일과 프랑스의 혁명 사상이 만나는 곳이었으며, 뷔히너는 이곳에서 프랑스 문학과 정치 사상에 깊이 빠져들었다.[10] 그는 프랑수아노엘 바뵈프와 클로드 앙리 드 생시몽의 공상적 사회주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대학교 내 신학부생 서클 "오이게니아"에 참여하여 정치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11] 1832년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 봉기가 일어났을 때, 뷔히너는 독일 시민 혁명의 가능성이 낮음을 한탄하는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11] 뷔히너는 하숙집 목사의 딸 빌헬미네 예글레(애칭 미너)와 사랑에 빠져 약혼했다.

2. 4. 기센 대학 시절과 혁명 운동

1833년, 뷔히너는 기센 대학교 의학부로 전학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달리, 기센에서의 생활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당시 기센 대학교에는 저명한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가 있었지만, 뷔히너가 전공한 생리학, 해부학 분야는 스트라스부르에 비해 뒤쳐져 있었다.[13] 특히 해부학 주임 교수 빌브란트는 구태의연한 생리학 이론을 내세우며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될 정도였다. 뷔히너는 후에 그를 모델로 한 괴짜 의사를 희곡 《보이체크》에 등장시킨다.[14]

뷔히너는 이 시기에 스트라스부르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편지를 친구와 빌헬미네에게 보냈고, 자신의 처지를 "비참한 생활"이라고 표현했다.[15] 그해 11월에는 뇌막염에 걸려, 이듬해 1월까지 친가에서 요양하게 되었다.

뷔히너는 기센으로 옮겨간 후에도 정치적 관심을 지속했고, 이 시기에 프랑스 혁명사 연구를 시작했다.[17] 1834년 2월경, 뷔히너는 전 신학부 학생 아우구스트 베커의 소개로, 초등학교 교두를 맡으며 정치 운동을 하던 루트비히 바이디히를 알게 되었고, 그와 그의 동료들과 정치적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다.[18] 뷔히너는 농민과 하층 계급 등 피착취민의 경제적 해방을 주장하고 그들을 선동하는 급진적인 혁명 이론을 펼쳤다.[19]

1834년 3월경, 뷔히너는 그의 의견에 찬성하는 소수의 학생들을 모아, "인권 협회"라는 비밀 결사를 기센에 설립했다. 5월에 귀향했을 때에도 다름슈타트에 "인권 협회" 지부를 만들었다.[20]

뷔히너는 농민 선동을 목적으로, 바이디히의 지원을 받아 선전 팜플렛 《헤센 급사》의 원고를 작성했다. 1834년 7월 30일에 인쇄된 《헤센 급사》는 "인권 협회" 회원과 바이디히의 그룹이 나누어 배포에 나섰다. 그러나 바이디히의 그룹에 스파이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곧 비합법 출판이 경찰에 발각되었고, 8월 1일에 《급사》를 소지하고 있던 미니게로데가 체포되었으며, 다른 관계자들에게도 차례로 경찰의 손길이 미쳤다. 뷔히너는 미니게로데의 체포 후 즉시 행동에 나서, 동료 슈츠를 망명시켰다. 뷔히너의 하숙에도 가택 수색이 이루어졌지만,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압수되지 않아 체포를 면했다. 그러나 지하 조직은 궤멸되었고, 농민에게 배포된 《헤센 급사》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지도 않고 경찰에 넘겨버렸다.[21]

2. 5. 망명과 죽음

1835년, 뷔히너는 헤센 대공국 당국의 감시를 피해 스트라스부르로 망명했다. 망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희곡 《당통의 죽음》을 집필하여 카를 구츠코프에게 보냈고, 구츠코프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출판을 약속했다.[2] 뷔히너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빅토르 위고의 희곡 《루크레스 보르자》와 《마리 튜더》를 번역하며 생계를 유지했다.[22]

1836년 초, 뷔히너는 소설 《렌츠》를 집필했고, 봄에는 희곡 《레온스와 레나》를 썼다. 여름에는 미완성 유작이 된 희곡 《보이체크》를 집필했다.[2] 같은 해, 뷔히너는 "잉어의 신경계에 관한 각서"라는 논문으로 스트라스부르 박물관 협회에서 호평을 받았고,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2] 그는 취리히 대학교에서 해부학 강사로 임명되어 "동물 해부학 실습" 강의를 시작했다.

1837년 2월, 뷔히너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슐츠 부부와 약혼녀 빌헬미네의 간호를 받았으나, 2월 19일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3] 유해는 처음에 취리히 시외의 체르트베르크 묘지에 매장되었으나, 이듬해 게르마니아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3. 작품 세계

뷔히너의 작품은 희곡 3편(당통의 죽음, 레옹스와 레나, 보이체크)과 소설 1편(렌츠)으로 많지 않지만, 당시 독일 문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뷔히너는 이상적인 인물만을 내세우고 다듬어진 문어체만 사용하던 기존 문단과 달리, 결함 있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당통의 죽음의 쾌락주의자 당통, 렌츠의 광인 렌츠, 보이체크의 최하층민 보이체크 등이 그 예시이다. 이들은 작품 속에서 외설적인 말을 하거나 토막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당시 문단에서는 이단적인 행위였다.[2]

뷔히너는 작품의 등장인물을 영웅이 아닌 '반(反)영웅'으로 설정하고, 이들이 다듬어진 문어가 아닌 일상어를 사용하게 했다. 또한, 의식의 흐름 기법의 모태가 되는 내면의 언어, 즉 '경험언어'를 소설 렌츠에 도입하여 외적 언어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 새로운 시도를 했다.

나아가 뷔히너는 완결된 문체와 구성, 즉 폐쇄 형식만이 문학의 예술성을 보장한다고 여겨지던 독일 문단에서 미완의 형식, 즉 개방 형식을 과감하게 선보였다. 그의 작품 중 생전에 출판된 것은 당통의 죽음 뿐이었으며, 이 작품은 독창성 부족, 비속한 언어 사용, 엉성한 구성 등으로 혹평을 받았다.[2]

뷔히너의 문학은 치열한 삶을 산 사람의 '심정 고백'과 같으며, 작품의 경향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의 작품에서는 경향성이 문학성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도를 높여준다. 벤야민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경향은 문학적 경향 또한 내포하고 있다. 함축적이든 명시적이든 올바른 정치적 경향 속에 깃들어 있는 이러한 문학적 경향이 바로 작품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라고 했는데, 뷔히너의 경향성이 바로 그러한 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뷔히너는 헤센 대공국에서 태어나 프랑스령 스트라스부르, 기센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기센 대학교 재학 중에는 반체제 운동에 관여하여 루트비히 바이디히와 함께 선동 문서 『헤센 사자』를 집필했다. 그러나 선동은 실패로 끝나고, 경찰의 손길을 피해 스트라스부르, 취리히로 망명하여 자연과학 연구에 종사했지만, 장티푸스에 걸려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

짧은 생애 동안 쓰인 그의 문학 작품들은 20세기에 재발견되어 자연주의, 표현주의 등 후세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이름을 딴 게오르크 뷔히너 상은 현대 독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2]

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제목내용
헤센 특사(Hessische Landbote)하층 노동자를 선동할 목적으로 쓰인 선전 문서이다. 헤센 대공국의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경제적 착취 현황을 고발하고, 하층 노동자 계급에게 자각을 촉구하려 했다. 뷔히너의 원고에는 착취하는 자들이 "부자들(die Reichen)"로 표현되었으나, 바이디히가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귀족들(die Vornehmen)"으로 고쳐 쓰고 성경 구절을 덧붙이는 등 대폭 수정했다. 뷔히너는 수정된 원고에 분개하며 더 이상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24] 원고는 비밀 인쇄소에서 인쇄되었지만, 스파이의 밀고로 불법 출판이 발각되어 실패하고, 뷔히너는 망명해야 했다.
잉어의 신경계에 관한 각서(Sur le système nerveux du barbeau)프랑스어로 쓰인 자연 과학 논문이다. 선행 연구를 참조하면서, 잉어의 뇌와 척수에 흐르는 각종 신경과 그 역할을 해부학적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박물관 협회에서 행한 강연을 논문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뷔히너는 이를 통해 튀리히 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튀리히 대학교에서 "두개 신경에 관하여"라는 시험 강연을 하여 강사로 채용되었다. 강연 내용은 당시 영국에서 지배적이었던 목적론적인 자연관을 비판하면서 뇌신경을 해부학적으로 논한 것이다.



뷔히너는 피에트로 아레티노를 소재로 한 희곡 『아레티노』를 구상했지만, 원고는 남아 있지 않다. 뷔히너 사후에 내용을 외설적이라고 생각한 빌헬미네가 파기했다고도 하며, 실제로 쓰여졌는지 여부도 불분명하다.[26]

3. 1. 《당통의 죽음》

프랑스 혁명기 공포 정치 하에서 관용파 조르주 당통과 그의 동료들이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정부에 의해 궁지에 몰려 단두대로 보내지는 과정을 그린 4막의 정치극이다. 헤센 특사로 인해 경찰의 수사가 좁혀오고 있음을 느끼고, 망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5주 안에 써 내려갔으며, 카를 구츠코에 의해 수정된 후 출판되었다. 뷔히너의 생전에 발표된 유일한 문학 작품이다. 아돌프 티에르의 『프랑스 혁명사』와 잡지 『현대』를 소재로 삼았다.[24]

뷔히너는 “이상적인 인물들만을 원하고” 정선되고 다듬어진 문어(文語)만이 공용어로 통용되던 당시의 독일 문단에, 당통과 같은 쾌락주의자처럼 결함을 지닌 인간들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 작품은 독창성이 부족하고, 등장인물들의 언어가 비속하며, 작품의 구성이 엉성하다는 혹평을 받았다.[24]

3. 2. 《렌츠》

슈투름 운트 드랑의 극작가 야코프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를 모델로 한 소설이다. 렌츠가 산을 넘어 목사 오베를린의 집에 방문하여 장기간 머무는 동안 점차 광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실제 사건에 기반하여 쓰여졌으며, 오베를린의 수기를 자료로 삼고 있다.[24] 결말 직전에 중단된 부분이 있어 미완으로 남았지만, 빠진 부분을 메우는 오베를린의 수기 사본이 남아 있어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뷔히너는 렌츠의 희곡 『군인들』, 『가정교사』 등에 영향을 받았다.

3. 3. 《레온스와 레나》

1836년에 쓰여진 《레온스와 레나》는 귀족 사회를 풍자하는 3막 희극이다. 포포 왕국의 왕자가 결혼을 싫어하여 남쪽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그 도중에 피피 왕국의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함께 포포 왕국으로 돌아가지만, 사실 그 공주가 왕이 정해 놓은 결혼 상대였다는 내용이다. 브렌타노의 희극 《폰스 데 레온》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뮈세, 셰익스피어 등의 영향도 엿보인다.[24]

3. 4. 《보이체크》

Woyzeckde는 20여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미완성 희곡이다.[25] 하급 군인 보이체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기묘한 목소리에 이끌려 외도를 한 애인을 찔러 죽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821년라이프치히에서 실제로 일어난 요한 크리스티안 보이체크의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이 사건 당시 작성된 그의 정신 감정서를 토대로 집필되었다. 원고는 뷔히너 사후 40년 정도 지나 카를 에밀 프란초스에 의해 복원되어 처음으로 공개되었으나 오랫동안 출판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단편적인 장면에 일련번호가 없고, 결정고와 미정고가 뒤섞여 있어 편집자에 따라 장면 배열이 다르다. 난해함 때문에 제목도 한동안 『보체크 (Wozzeck)』로 여겨졌으며, 오페라에서는 현재도 이 표기가 사용되고 있다.

4. 후대의 영향

뷔히너는 사후 오랫동안 잊혔으나, 19세기 말 카를 에밀 프란조스의 노력으로 그의 작품이 재발견되어 독일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프란조스는 판독이 불가능했던 『보이체크』의 초고를 과학적으로 복원하여 1875년에 발표하고, 1879년에는 전집을 출판하여 뷔히너 재평가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2]

뷔히너의 작품은 자연주의표현주의 등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2] 하웁트만은 뷔히너의 "힘 있는 언어"와 "생생한 묘사", "자연주의적 인물 서술"을 극찬했으며, 그의 작품 ≪사도(使徒)≫와 ≪선로지기 틸≫은 뷔히너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아르놀트 츠바이크는 뷔히너의 유일한 산문 소설인 ''렌츠''를 "현대 유럽 산문의 시작"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베데킨트는 뷔히너 작품의 과장된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높이 평가하여 부조리 문학의 선구자로 주목했고, 이는 표현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28] 이후에도 뷔히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29]

뷔히너의 희곡은 오랫동안 상연되지 못하다가, 표현주의 연극이 등장한 19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상연되기 시작했다. 1913년 뷔히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뮌헨에서 『보이체크』가 초연되었고, 1916년에는 막스 라인하르트에 의해 『당통의 죽음』이 상연되어 이후 뷔히너 작품 상연의 모범이 되었다. 알반 베르크는 뷔히너의 『보이체크』를 바탕으로 무조 오페라 『보체크』를 작곡하여 1925년 베를린에서 초연했다.

뷔히너의 이름을 딴 게오르크 뷔히너 상은 오늘날 독일 문단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로 1922년 제정되었다.[2] 하인리히 뵐, 귄터 그라스 등 독일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은 뷔히너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뷔히너의 영향을 언급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The Oxford Companion to German Literature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照らし出された戦後ドイツ
[3] 서적 Georg Büchner - Biographie
[4] 서적 전집
[5] 서적 Georg Büchner - Biographie
[6] 서적
[7] 서적 전집
[8] 서적 전집
[9] 서적 谷口[1997]
[10] 서적 谷口[1997]
[11] 서적 전집
[12] 서적
[13] 서적 谷口[1997]
[14] 서적
[15] 서적 전집
[16] 서적 전집
[17] 서적 전집
[18] 문서 헤센대공국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전집
[22] 서적 전집
[23] 서적 전집
[24] 서적 전집
[25] 웹사이트 ゲオルク・ビューヒナー『ヴォイツェク』が、山本耕史主演、赤堀雅秋脚本、白井晃演出で上演決定! https://www.oricon.c[...] ORICON NEWS 2020-10-11
[26] 서적 照らし出された戦後ドイツ
[27] 서적 谷口[1997]
[28] 서적 전집
[29] 서적
[30] 서적 ヴォイツェック ダントンの死 レンツ
[31] 서적 谷口[1997]
[32] 서적 照らし出された戦後ドイ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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